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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읽는 책장]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지금 나에게 6개월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일 년의 절반이나 되는 꽤 긴 시간이지만, 살아온 날들을 정리하기에는 턱없이 짧게 느껴진다. 죽음을 앞둔 노인이 한 명 있다. 보스턴의 어느 교외 지역, 그는 히비스커스 화분이 있는 서재에 앉아 숨을 들이쉬고 다음 내쉴 때까지 숫자를 헤아리면서 자신의 죽음이 어디까지 가까워졌는지를 가늠해 본다. 그러다 디트로이트의 한 신문사에서 일하던 그의 제자가 우연히 TV에 나온 죽어가는 스승의 모습을 보고 그를 찾아온다. 교수와 제자의 만남은 서로의 인생에 큰 계기가 됐다. 교수에게는 인생을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시간이, 제자에게는 사회적 성공과 야망을 향해 질주하던 삶에 쉼표가 됐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사진)은 제자인 미치 앨봄 (Mitch Albom)이 매주 화요일마다 대학 시절 은사였던 모리 슈워츠 (Morrie Schwartz)를 찾아가 나눈 14번의 만남을 글로 옮긴 책이다. 그들의 대화 주제는 세상, 가족, 죽음, 자기 연민, 사랑이다. 둘의 대화가 유독 공감이 가는 이유는 누구나 살면서 겪는 감정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루게릭병에 걸려 촛불 같은 삶을 사는 모리 교수는 자신에게 죽음이 이미 깊숙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연했다. 제자는 모리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려 찾아왔다가 도리어 고민이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결국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엉엉 아이처럼 울어버린다. 그런 일은 미치가 처음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모리를 위로하려 찾아왔지만,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고 오히려 한아름 위로를 받고 돌아갔다. 교수와 제자가 나눈 대화 중 유난히 인상 깊은 대목이 있다. 미치가 “젊음이 부럽지 않나요?” 묻자 모리 교수는 이렇게 답한다. “내 안에는 모든 나이가 다 있네. 난 세 살이기도 하고, 다섯 살이기도 하고, 서른일곱 살이기도 하고, 쉰 살이기도 해. 그 세월을 다 거쳐 왔으니까, 그때가 어떤지 알지. 어떤 나이든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구! 지금 이 나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이가 다 내 안에 있어. 이런 데 자네가 있는 그 자리가 어떻게 부러울 수 있겠나. 내가 다 거쳐 온 시절인데?” 물론 모리 교수도 젊음은 좋은 것이라 말한다. 마음껏 운동하고 춤출 수 있기 때문이다. 좋지만 부럽지는 않다는 그에게서 허세나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점점 많은 것을 배운다. 스물두 살에 머물러 있다면 언제나 스물두 살 만큼만 알게 될 것이다. 나이 드는 것은 단순한 쇠락이 아니라 성장인 셈이다. 교수는 진심으로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사랑했다. 심지어 가장 두려워했던 타인이 자신의 엉덩이를 닦아줘야 한다는 현실까지도 즐기려 했다. 미치 앨봄은 대학 시절 부자는 나의 적이고 와이셔츠와 넥타이는 죄수복이라고 생각했다. 잠에서 깨어나 어디로든 떠나갈 자유, 오토바이를 몰고 파리 뒷골목을 누비거나 티베트에 들어갈 자유가 없는 것은 행복한 삶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1980년대가 흘러가고 1990년대도 그렇게 갔다. 그 많던 꿈들을 월급봉투와 맞바꿔 버렸다. 줄달음치듯 살다 보니 어느새 월급봉투는 두툼해졌지만, 마음은 구멍이 난 것처럼 시렸다. 텅 빈 영혼으로 자존감을 잃어갈 때 모리 교수를 만났다. 교수는 그런 제자의 마음을 읽은 듯 마음속으로 우러나는 일을 하라고 조언한다. 그렇다면 질투심으로 괴로워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지도 않을 거라고. 기적은 없었다. 모리 교수는 곧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었다고 해서 그들의 관계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 그는 현재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 아내와 함께 ‘드림 펀드(Dream Fund)’, ‘어 타임 투 헬프(A Time To Help)’, ‘S.A.Y 디트로이트(S.A.Y Detroit)’ 등 세 개의 자선 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이소영/언론인, VA 거주

2018-04-01

미투…1987…촛불…힙합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다. 언뜻 암호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 단어들의 뿌리를 짚어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대중의 분노가 만들어낸 결과이다. 그들 세계에서 제왕으로 군림했던 가해자를 ‘#me too’라고 고발할 수 있었던 힘은 참을 만큼 참은 피해자들의 울분이 폭발한 데 있었다. 불의한 권력으로부터 6.29 민주화 선언을 끌어내고, 대통령 직선제를 한국 땅에 정착시킨 1987년, 그해 한 차례 봄이 왔다. 제도로서의 한국 민주주의는 1987년 6월항쟁에서 출발했고, 그 바탕에는 군부 독재가 부른 시민들의 분노가 있었다. 그리고 재작년 겨울, 시민들은 다시 광장에 모였다. 87년 어렵게 이룬 민주주의가 타락해버리자 시민들은 저마다 촛불을 들고 혁명을 외쳤다. 그렇게 모인 공공의 분노가 대통령을 바꿨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쓸데없는 일에 화내고 있는 건가?” 자책하게 된다면 이것이 마땅한 분노인지 여부를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간혹 용감한 저항과 알량한 호기를 착각하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프랑스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은 그의 책 <분노하라>(사진)에서 “분노할 일을 넘겨 버리지 말라. 찾아서 분노하고 참여하여, 반죽을 부풀리는 누룩이 돼라.”고 외쳤다. 덧붙여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라고 일갈한다. 분노할 힘과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기 때문이다. 결국 분노는 현실에 참여해 바꾸겠다는 의지 표현인 셈이다. 분노에도 급이 있다. 골목길 주차 시비 현장을 가정해보자. 상대편 차가 경차인 데다 차 주인이 20대 여성인 경우, 남자는 다짜고짜 차 빼라고 소리치고 여자는 월담하다 학생주임에게 걸린 여학생처럼 잔뜩 쫄아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운전도 못 하는 새파랗게 어린 게 어딜 들이대냐는 호통은 덤이다. 반면 팔뚝에 봉황 문신을 두른 남자가 찌푸린 표정으로 차 문을 내린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차 빼라고 소리 지를 준비하던 남자는 문신남을 보자마자 머쓱해 하며 급하게 자리를 비켜줄 것이다. 직장 상사와 고객의 부당한 갑질에 머리를 조아리던 영업맨이 집에 와서는 폭력 남편으로 변신하는 장면도 낯설지 않다. 권력의 먹이사슬 아래 칸에 매달려 있는 남자가 감히 윗 칸에 대들 용기는 없으니 만만한 아래 칸 약자에게 횡포를 부리는 모양새다. 정작 화내야 할 일에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유독 작은 일에 파르르 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정의로운 분개가 실종된 성난 사회의 근저에는 공포가 똬리를 틀고 있다. 저항하기 위해서는 순종과 인내를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 인식을 거슬러야 하고, 홀로 다수를 상대해야 하는 외로움을 감수해야 하며, 그에 따른 비난과 차별을 감당해야 한다. 저항하는 대신 냉소하기는 아주 쉽다. 적어도 문제의식은 느꼈으니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자기 위안과 더불어 나서 봤자 달라질 건 없더라는 무력감이 무관심을 부추긴다. 스테판 에셀은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기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고 나지막이 경고한다. 그러면서 독자들에게 ‘정당한 분노’와 ‘작은 실천’을 촉구한다. 자신이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끊임없이 분노의 대상을 찾아 거침없이 분노하라고 말이다.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여전히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일 투성일 것이고, 그것을 감시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이 칼럼의 마지막 주제 ‘힙합(Hip Hop)’은 무엇을 의미할까? 오랜 노예제도에 억눌려있던 흑인들은 그들의 한과 울분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가난하고 못 배운 흑인들이 제대로 악기를 갖추고 장단조 형식을 맞췄을리 없다. 그렇게 기존 레코드를 버무려 리듬을 만들고 하고 싶은 말을 가사로 옮겼다. 이것이 힙합과 랩의 시작이었다. 흑인의 분노는 힙합이라는 훌륭한 대중음악을 탄생시켰다. 지금의 me too 운동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시대 화두가 된 듯 보인다. 당분간 사회를 달구는 뉴스로 흘러가 버리는게 아니라 대중의 분노로 아주 약간의 변화라도 끌어내길 소망한다. 그 과정이 비록 길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이 또한 의미 있는 문화 혁명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소영/언론인, VA 거주

2018-03-19

꽃 달고 살아남기

열여덟. 어찌 보면 어리고, 어찌 보면 십 대의 끝물 같고, 또 어찌 보면 욕 같은 나이. 아이와 어른의 경계선에선 열여덟은 한없이 혼란스러운 나이다. 모두가 꽃 같은 나이라고 부러워할 때도 그때는 몰랐다. 그 나이가 왜 부러움의 대상인지를. 여기 누구보다 치열한 열여덟 성장통을 겪는 소녀가 있다. 최영희 작가의 소설 <꽃 달고 살아남기>(사진)의 주인공 진아가 체감하는 열여덟은 그다지 젊지 않다. 물갈이 때를 넘긴 실내 수영장처럼 고약한 비린내와 소독약 냄새가 뒤섞인 것 같다. 쉽게 말해 한번 갈아엎을 때가 됐다는 얘기다. 이대로 무심코 어른이 되고 싶진 않다. 17년 전 지저분한 포대기에 싸여 시골 마을에 버려졌던 진아는 어느덧 도시로 유학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어릴 때 엄마와 시골 장터에 가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말했다.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애” 진아는 엄마 치맛자락을 꼭 붙든 채 절대 울지 않았다. 그들은 진아와 엄마의 사연을 알지 못했다. 진아는 다른 마을로 가는 버스처럼 짓궂은 농담이 무심히 내 곁을 스쳐 가게 두었다. 어느 날 자신이 장터를 떠도는 꽃년이를 닮았다는 노인들의 수군거림을 엿듣게 된 진아는 생모가 궁금해졌다. 그 과정에서 뜻밖에 “니 어데 아프나?” “벵원부터 가 봐라.” 따위의 말들을 듣게 된다. 과연 진아의 친엄마는 누구이고, 날이 선 말들 속에 감춰진 비밀은 무엇일까? 진실을 궁금해하는 진아에게 마을 어른들은 모두 ‘좋게좋게’ 넘어가라고 하지만, 진아는 진정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찾아 나서기로 한다. 그래서 진아는 감히 역주행을 택한다. 미친 사람이나 한다는 역주행, 일단 사고가 났다 하면 백 퍼센트 황천길로 간다는 역주행. 사실 이건 꽃년이와 진아가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다. ‘나는 누구인가? 스티커를 똑똑 떼어낸 흔적처럼, 내 인생 곳곳에 빈 자국으로만 남아 있는 그는 누구인가?’ 한 번쯤 묻고 싶었다. 거침없는 진아에게도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바로 엄마다. 버려진 나를 안은 엄마, 나에게 처진 젖가슴을 내어준 엄마. 누가 뭐래도 진아는 엄마 딸이다. 지금 하려는 일이 나와 엄마의 세상을 깨뜨리는 게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다만 진실을 알고 싶을 뿐이었다. 진아가 “어디에서 어디를 거쳐 이곳까지 왔을까?내 인생에서 지워진 사람은 누구일까? 나 역시 그 사람 인생에서 지워졌을까?” 세상을 향해 묻고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은 흥미진진하다. 세상의 음모를 파헤치겠다는 ‘엑스파일’ 마니아 인애. 오타쿠 물리 선생이 진아와 인애를 도우려다 변태로 몰린 상황 등 진아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사연으로 힘겨워하지만 서로 보듬고 다독이며 삶을 긍정한다. 그리고 진아는 되뇐다. 나와 함께 이 길을 나선 친구를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모두의 눈에 내가 돌아 보인다 해도 나는 계속 내 길을 가겠노라고. 열여덟 살 진아는 일흔여섯 살 할머니뻘 되는 엄마 밑에서 입양아로 자라 온 자신의 처지를 비하하거나 연민하지 않고 담백하게 바라보면서, 모두가 쉬쉬하는 진실을 향해 꿋꿋하게 걸어 나간다. ‘좋게좋게 넘어가라.’며 침묵을 강요하는 세상에 당찬 도전장을 내민 그들이 대견하다. 모두가 미친짓 그만하고, 길러준 엄마에게 효도나 하라고 말린다. 그런 마을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말릴 생각 하기 전에 한여름 뙤약볕보다 뜨거운 격려를 보내줄 수는 없었는냐고. 그것이 열여덟 청춘을 향한 어른의 도리가 아니던가.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누가 감히 진아가 미쳤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은 정말로 미치지 않고서 그 시간을 통과해 왔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나 다운 것’을 고민하고 있는 열여덟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머리에 꽃을 달아도 된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평범한 삶에 나를 끼워 넣지 말고 자신만의 꽃을 달고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주인공 ‘박진아’는 혼미한 세상에서 머리 풀고 헤매는 또 다른 나인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소영/언론인

2018-03-12

[마음을 읽는 책장] 상상바다 속 ‘고래’를 만나다

1989년, 미국에서 ‘백 투 더 퓨처 2’(Back to the Future, Part II)가 개봉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허무맹랑한 미래 이야기를 비웃었다. 영화 속 2015년의 모습에는 납작한 평면TV, 가상현실 헤드셋 기기, 지문인식 결제시스템이 등장한다. 아득한 미래도시로 보이던 영화 장면이 어느새 우리 현실이 된 지 오래다. 게다가 공중을 떠다니는 스케이트보드, 자동으로 신발 끈을 조절하는 파워레이스 운동화는 이미 몇 년 전 출시됐다.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말도 안 돼!”라고 치부했던 과거가 부끄러울 정도다.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현실이 될 수 있다. 다만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이다. 어디 SF 공상과학 영화만 그럴까? 소설 역시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꾸며낸 가짜 이야기라는 큰 맥락은 같다. 진짜가 아닌 줄 알면서도 주인공이 위험에 처하면 내 심장이 벌렁거리고, 주인공이 누명을 뒤집어쓰면 내 손이 부들거린다. 말도 안 되는 허무한 판타지일수록 홀리기 쉽다. 그런데 여기 홀린 줄도 모르고 빠져들게끔 독자를 현혹하는 소설이 있다. 천명관 작가의 <고래>(사진) 이다. 이야기 얼개만 대충 설명하자면, 소설은 3대에 걸친 파란만장한 여자들 이야기다. 주인공들의 삶은 유난히 치열하다. 살아간다는 표현보다 이겨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들의 부침이 유난히 가슴 아픈 이유다. 금복은 우연히 만난 생선 장수를 따라 이끌리듯 바닷가로 향한다. 그곳에서 큰 고래를 만난 이후, 손대는 사업마다 크게 성공한다. 그의 딸 춘희는 타고난 강골이어서 코끼리에 밟혀도 끄떡없다. 감옥에서 출소하자마자 폐허가 된 벽돌공장으로 돌아와 벽돌 빚는 일을 계속한다. 여기까지 반세기에 걸친 여장부의 이야기인가 싶을 때쯤, 흉측한 모습을 한 노파가 등장, 주인공을 파국으로 이끈다는 설정이다. 그녀들의 이 모든 이야기가 한 편의 복수극이었다. 천명관 작가는 각각의 이야기들을 소설 전반에 흩뿌려놓았다. 맨몸으로 시작해 거대 사업가가 된 금복의 성장기가 한창일 때 벽돌공장 장인정신을 이어가는 춘희 이야기로 껑충 뛴다. 이 조각들을 하나로 꿰는 힘은 뭐니 뭐니 해도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봤음 직한 익숙함일 것이다. 어렸을 때 읽었던 ‘세계명작동화전집’처럼 말이다. 소설은 여러 시대를 살다 간 인물들의 이야기이기도, 현재를 사는 오늘날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눈으로 보거나 직접 겪지 않았을 뿐, 금복과 춘희가 사실은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코끼리에 밟혀도 멀쩡한 사람이 존재할 수도 있다.  가끔 해외토픽에 소개되는 세계의 기이한 화제도 있지 않은가. 영화 ‘백 투 더 퓨처’가 30년 후 기술 실현을 이뤘듯이 금복 모녀의 이야기 역시 훗날 누군가에 의해 기록이 발견될지 모를 일이다.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란 본시 듣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이야기꾼의 솜씨에 따라, 가감과 변형이 있게 마련이다. <고래>를 읽고 저마다 다른 감상을 머릿속에 저장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세 여자 인생을 기억할 것이고, 누군가는 금복의 손에 죽어간 철 가면, 청산가리 같은 다른 인물을 기억할 것이다. 누구를 어떻게 기억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소설이라는 거대 바닷속에서 이 등장인물들과 함께 신나게 헤엄쳤다면 그걸로 그만이다. 이 소설에는 특이하게 화자가 등장한다. 무성영화 시절 영화를 해설하던 참견꾼 변사의 역할이다. 지나치게 허무맹랑해서 실소가 터져 나올 때쯤 등장해 “이것은 뻥이다”고 속 시원히 외치며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같이 한번 지켜보자고 독자들을 끌고 간다. 그래서인지 그럴싸한 이야기로 진짜인지 가짜인지 헷갈리게 하는 소설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소설이 꼭 현실적 공감을 끌어낼 필요는 없다. 도떼기시장 야바위꾼이 늘어놓는 잡설을 듣고 까르르 웃는 것처럼 소설을 읽고 그 순간 즐거웠다면 그것으로 제 역할을 다 한 것이 아닐까. 이소영/언론인

2018-01-22

[마음을 읽는 책장]기구한 도시 '홍콩'

신비로운 땅 홍콩. 행정구역상 중국이라고는 하지만 대만과 마찬가지로 동남아시아의 한 나라처럼 여겨진다. 100년 동안 영국 식민지배를 받다 다시 중국으로 반환되는 복잡한 역사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운지 모르겠다. 1997년 7월 1일,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는 시기를 전후해 홍콩은 그야말로 대공황 그 자체였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중국사람이지만 100년 동안 영국식 교육을 받고 영국식 문화, 정치적 영향을 받은 홍콩주민들은 자신이 중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산주의 중국 치하를 피하고 싶었던 많은 지식인이 영국, 캐나다, 미국으로 망명을 신청했고, 정체성 혼란에 빠진 사회는 깊은 우울을 겪는다. 이 혼돈의 한 가운데를 재치있게 담아낸 소설이 있다. 찬호께이 작가가 쓴 <13.67>(사진)이다. 홍콩의 중국 귀속을 원하던 마오주의자와 경찰 사이의 격돌이 벌어진 1967년부터 홍콩이 반환된 1997년을 거쳐 2013년에 이르기까지 6개의 범죄사건을 시대 역순으로 훑어가는 이야기다. 뛰어난 추리 능력을 갖춘 홍콩 경찰총부의 전설적 인물 관전둬, 그의 오랜 파트너 뤄샤오밍은 까다로운 사건들을 척척 해결하며 홍콩의 파수꾼 역할을 한다. 첫 번째 단편소설 ‘흑과 백 사이의 진실’은 관전둬가 경찰총부에서 퇴직한 뒤 말기 암 환자로 혼수상태에 빠진 2013년이 배경이다. 파트너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뤄샤오밍은 특수장치를 이용해 관전둬와 의사소통하며 대기업 회장 살인사건을 해결해나간다. 세 번째 단편 ‘가장 긴 하루’는 홍콩이 반환되던 97년에 벌어진 사건이다. 관전둬는 반환 한 달 전 은퇴한다. 소설 속에는 세 가지 사건이 등장하는데, 뒤에 가서는 결국 하나의 큰 사건으로 압축된다. 마지막 단편 ‘빌려온 시간’이 가장 인상 깊다. 배경은 67년으로 돌아간다. 지금까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이끌어온 소설은 마지막 단편에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바뀌고 화자 ‘나’가 등장한다. 사건을 해결하는 형사들은 본명 대신 아칠 선배, 아삼 후배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서로 다른 성격의 두 형사와 ‘나’가 힘을 합쳐 어렵사리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모습은 풋풋해 보이기까지 하다. 작가는 왜 시간을 거꾸로 내달리는 독특한 구조를 택했을까? 여섯 편으로 나뉘어 시차를 두고 일어나는 개별 사건을 잇는 큰 맥락은 무엇일까? 소설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홍콩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사회, 정치적으로 격변을 겪어온 홍콩에서 경찰로 살아가는 관전둬의 모습은 1967년과 2013년 사이 크게 변한다. 홍콩이 영국령이라는 사실은 중국인들의 민족적 자부심에 상처를 입혔다.중국은 시시때때로 홍콩 침공을 노렸고, 급기야 67년 발생한 국경 분쟁으로 홍콩 경찰 5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시기에 관전둬는 홍콩 경찰로서 자부심과 의욕이 절정에 달했다. 이후 70~80년대 홍콩은 경제특구로서 중국 수출품의 방출구 역할을 하게 되었고, 금융과 은행 중심지로 부상한 홍콩은 더욱 부강해진다. 이때가 홍콩 경찰의 황금기였다. 일 잘하는 경찰을 향한 주민들의 신뢰도는 하늘을 찔렀다. 문제는 97년 반환 시기가 돌아왔을 때다. 당시 경찰은 순수하게 범인을 잡는 역할만 하지는 않았다. 사회 혼란 속에 각종 시위가 계속되자 경찰이 정치적인 일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관전둬의 경찰 은퇴는 정치적 도구로 전락한 경찰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지 20년이 지났다. 그 사이 홍콩은 중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더 큰 경제발전을 이뤘다. 하지만 온전히 중국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영국도 아닌 혼란스러운 홍콩의 정체성은 여전한듯하다. 이제 홍콩은 정치, 입법, 사법체제 유예가 끝나는 2046년까지 1국가 2체제를 완전히 정리하고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이 소설은 2013년 혼탁한 모습과 1967년 어지러웠던 시절이 서로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뱀 같은 구조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는 도대체 이 악순환에서 벗어날 방법은 무엇인가 운명적 탄식을 하게 된다. 영국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관전둬가 세상을 떠난 이후 남은 뤄샤오밍의 미래가 궁금해진다. 지난한 식민지 시민의 삶을 끝내고 모국 중국에 완전히 소속될 수 있을지. 이소영/언론인

2018-01-16

[마음을 읽는 책장] 2018년, 조선에서 길을 찾다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자신의 그림, ‘세한도’에 발문으로 인용한 논어 구절이다. 다른 나무들과 같이 내내 푸르렀을 때는 그 진가를 알지 못한다. 모두가 시들고 벌거벗었을 때야 비로소 변함없이 푸른 저력을 발휘한다. ‘세한도’를 본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초라한 집 한 채와 고목 몇 그루가 겨울 추위에 떨고 있는 모습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추사 김정희는 이 그림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의 굴곡진 인생에서 짐작할 수 있다. 추사는 집권세력인 안동 김씨의 미움을 사 여러 차례 수난을 겪는다. ‘세한도’는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역관으로 중국에 다녀올 때마다 귀한 서적을 보내준 제자 이상적에게 보내준 답례였다. 유배 간 뒤에도 스승을 외면하지 않고 유배 가기 전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대해준 제자에 대해 고마움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공자가 겨울이 되어 소나무나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듯이 김정희 자신도 어려움에 빠지고 나서야 진정한 친구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함영이 작가는 수필달력 <2018년, 조선에서 길을 찾다>(사진)에서 추사 김정희의 작품 ‘세한도’를 제일 앞장, 1월에 소개하고 있다. 유난히 폭풍 같았던 시간을 뒤로 하고 새해를 맞는 각오를 보여주는 듯하다. 한바탕 소용돌이를 마주할 때마다 드는 의문점이 있다. 역사는 도돌이표 같아서 어떤 형태로든 반복되기 마련인데, 과거는 어떻게 흘러왔을까? 조선 시대 역사에서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매달 소개되는 역사의 한 페이지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현실 정치와 조선의 역사가 묘하게 겹쳐있기 때문이다. 견뎌내고 다듬어온 지난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면 새해는 기대가 더 클 것이다. 추운 겨울, 따끈하게 몸속을 덥혀주는 설렁탕의 유래를 아는가? 농사법을 가르쳤다는 신농씨와 후직씨를 주신으로 제사를 지내던 선농단. 매년 경칩이 지난 뒤 첫해일(돼지날) 택해 제사를 지내고 나면 임금이 직접 밭을 가는 친경의식을 거행하면서 농업의 소중함을 알렸다. 의식이 끝나면 음식을 백성들과 고루 나누어 먹기 위해 부족한 고기를 푹 고아 국물을 내어 돌렸다. 이것이 설렁탕의 유래다. ‘백성은 누구나 소중하다’는 위정자의 자세가 묻어 나오는 대목이다. 신농제는 순종 융희 3년(1909)을 마지막으로 일제에 의해 사라졌지만 푸근한 설렁탕 정신만큼은 잊지 말아야겠다. 조선이 너무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진다면 정동길을 가보자.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경향신문으로 가는 정동길. 궁궐과 마포나루가 가까워 아관파천으로 유명한 러시아공사관 등 외교가들이 들어서며 이름값을 높였다. 외교가를 타고 들어온 신문물은 이곳을 시작의 터로 만들었다. 우리나라 개신교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정동제일교회,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인 배재학당과 여성 교육의 서막을 알렸던 이화학당,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 자리까지 숨바꼭질하듯 이 언저리에 숨어있다. 서울의 가장 낭만적인 길로 꼽히는 정동길을 걷다 보면 새 시대를 향해 분주히 움직였던 조선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조선은 기록과 보존의 나라였다. 특히 임금을 중심으로 한 정사, ‘조선왕조실록’은 정확성과 객관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기록문화에 등재될 정도다.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의 기록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크다. 조선 최고의 실학자인 정약용을 발굴한 정조로부터 사람다움의 길을 묻고, 시대를 앞선 천재 성군 세종으로부터 소통의 리더십을 묻는다. 역사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역사를 꼼꼼히 되짚어보면 현실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소영/언론인

2018-01-08

[마음을 읽는 책장] 수레바퀴 아래서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고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생각하게 하는 12월이다. 별일 없이 살았으니 다행이라고 위안해야 하는 건가, 세웠던 목표 고스란히 다음 해로 떠안고 가야 하는 자신을 원망해야 하는 건가. 왜 꼭 이맘때가 되면 자괴감이 밀려드는지 모르겠다. 지난 열 한 달 내내 평온했으면서. 헤르만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사진)가 떠오른다. 수레바퀴 밑으로 밀어 넣는 사회에 맞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안한 청소년 한스는 전형적인 실패한 수재다. 마을에서 똑똑하기로 이름난 한스는 최고 명문 신학교에 입학하지만, 그곳의 과도한 경쟁과 권위적인 교육을 못 견디고 우울증에 걸린 채 마을로 돌아온다. 이후 공장 대장장이 견습공이 된 한스는 마을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된다. 수레바퀴 궤도에서 이탈한 그는 ‘신학교에 다녔던 대장장이’일 뿐이었다. 그동안 공부에 흘린 숱한 땀과 눈물, 억눌러야 했던 자그마한 기쁨들, 자부심과 공명심, 그리고 희망에 넘치는 꿈도 모두 헛된 것이 되고 말았다. 한스의 장래는 이미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 지역에서는 부모가 부유하지 않을 경우 재능있는 아이들 앞에 단 하나의 좁은 길만이 놓여있었다. 그 길은 주(州) 시험에 합격해 신학교에 입학한 뒤, 거기서 다시 수도원에 들어가고, 나중에 목사가 되어 설교단에 서거나 아니면 대학의 강단에 서는 것이었다. 한스의 운명은 자신이 뜻하는 대로가 아닌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 권위 있는 사람들이 닦아 놓은 ‘좁은 길’로 자신도 모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한스 또한 그 좁은 길로 가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토끼 기르기, 낚시하기, 산책하기를 제치고 공부에 전념했다. 부모님과 선생님의 자랑거리가 될 일에 우쭐했다. 동네 철공소나 치즈가게에서 일하게 될 그저 그런 친구들을 내려다보게 될 거라는 꿈도 꿨다. 하지만 조금만 한눈팔면 수레바퀴 밑으로 깔리게 되는 신학교의 경쟁 체제는 적응하기 힘들었다. 신학교를 포기하고 마을로 돌아와서도 한스는 한동안 괴로웠다.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도 힘들었고, 평소 미천하게 생각했던 노동자의 삶을 자신이 살게 됐다는 사실도 절망적이었다. 결국 한스는 어느 날 물에 빠져 죽은 채로 발견된다. 그것이 자살인지, 실족사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마을의 고루한 신사 양반들이 한스를 이 지경에 빠지도록 도와줬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헤르만 헤세 역시 신학교의 엄격한 규율에 적응하지 못하고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다 퇴학당한다.한스처럼 마을로 돌아와 시계 수리공으로 일하기도 했다. 소설 속 한스는 헤르만 헤세의 분신이었다. 다만 한스는 우울한 청소년기를 자살로 마감하지만 헤르만 헤세는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수레바퀴 아래서>를 썼을 당시 헤세는 29살이었다. 대중에서 더 많이 알려진 <데미안>을 놔두고 13년 일찍 발표된 그의 초창기 소설을 대표작이라 꼽는 이유는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이야기인 이유가 크다. 19세기 독일 풍경이 어쩐지 21세기 우리의 현실과 겹쳐 보인다. 경쟁에서 밀려나 수레바퀴 아래 깔릴까 두려움에 떠는 게 어디 한스 뿐이랴. 낭창낭창한 젊은이들이 그 나이 특유의 싱그러움을 잃고 공부하는 기계로 전락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게다가 입시 지옥을 간신히 빠져나왔다 해도 취업, 대출, 승진, 노후 지옥이 줄줄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수레바퀴 아래서> 속 주인공 한스는 규격화된 제도 속에서 기성세대의 압박을 온몸으로 받고 자라난 오늘날 우리인지도 모르겠다. 수레바퀴 아래 깔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가며 한 해를 달려온 우리 모두에게 헤르만 헤세의 말을 전한다. “선생과 학생 중 누가 상대를 억누르고 괴롭히는가. 상대의 인생과 영혼에 누가 더 상처를 입히는가.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 그 누구도 분노와 수치심 없이 어린 시절을 돌아볼 수는 없을 것이다.” 끔찍한 소년기를 보낸 헤르만 헤세가 자살 충동을 못 이겨 소설 속 한스처럼 생을 마감했다면 아름다운 소설도, 노벨 문학상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경험이 오히려 20세기 초 독일의 ‘기숙학교 문학’이라는 장르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소영/언론인, VA 거주

2017-12-18

[마음을 읽는 책장] 혼자일 것 행복할 것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집 주소가 ‘서울특별시 ㅇㅇ구 ㅇㅇ동’인 친구들이 제일 부러웠다. ‘내 부모는 왜 나를 서울에서 낳고 기르지 못해 월세방을 전전하는 신세로 만드셨나?’ 원망도 했었다. 그저 혼자 살아보고 싶어서 여행 가방 하나 들고나와 오피스텔을 얻는 것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먹고 사는 사정상 강제 독립을 하게 되는 경우는 마음가짐부터가 다르다. 안락한 둥지를 떠난 아기 새가 포식자들이 득실대는 정글에 뛰어든 느낌이랄까. 특히 서울의 미친 집값은 내 존재를 변두리 반지하방 계급으로 끌어내리는 것 같아 더욱 서글프다. 혼술, 혼밥, 혼행이라는 신조어가 낯설지 않은 요즘. 바야흐로 나홀로 전성시대다. 미디어에 소개되는 싱글라이프는 하나같이 ‘자유’, ‘화려’, ‘여유’의 이름을 빌려 낭만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부모님 곁을 떠나 혼자의 공간을 갖고 살림을 꾸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독립’이 말처럼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TV 드라마에서 보던 여주인공들의 화려한 싱글라이프를 재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유지비용이 필요하다. 실제 독립생활은 구멍 난 소금 자루를 짊어지고 빗길을 걷는 기분, 자산이 줄줄 녹아나는 기분, 숨만 쉬어도 돈이 줄줄 새나가는 기분이다. <혼자일 것 행복할 것>(사진)에서 홍인혜 작가는 이렇게 날 것 그대로의 독립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독립을 결심한 뒤, 자취방 부동산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순간 일당백 무임금 근로 계약이 발효된다. 집안 부터 공과금 납부, 세간 장만이 오롯이 혼자의 몫이 되고, 불현듯 밀려오는 무서움은 덤이다. 바깥의 작은 소음에도 예민해지고, 혹시 내가 뉴스에서나 보던 범죄피해자가 되지는 않을까 봐 마음 졸여야 했고, 다세대 주택의 층간 소음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특히 인터넷 설치 기사, 화장실 수리공이 집에 들어올 때는 톰슨가젤의 영역에 육식동물이 들이닥친 것처럼 긴장해야 했다. 생활비는 스스로 벌 수 있고, 형광등 따위도 얼마든지 내 손으로 갈아 끼울 수 있다. 하지만 때때로 어쩔 수 없는 여성으로서 존재의 물리력을 체감할 수밖에 없다. 그런 불편함 속에서도 그녀의 독립생활은 결과적으로 그녀를 더욱 그녀답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가족과 함께 살 때는 꿈쩍하는 것조차 힘들었던 몸이 독립 후 운동마저 착실히 하는 성실한 몸으로 바뀌었다. 자신을 정직하고 바라보고 자신과 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작은 그녀의 공간이 우주와도 같은 광활한 가능성을 선사해주었다. 온전히 그녀의 취향으로만 가득한 우주 속에서 정신적, 경제적 독립을 이뤄가고 있다. 혼자 살면 외롭지 않을까? 배고픔이 위장의 허기라면 외로움은 관계의 허기. 때로 가득 찬 위장보다 허기가 되레 뿌듯하고 감미로울 때가 있는데, 외로움도 그와 같다. 관계의 과잉으로 영혼이 부대낄 때(마치 과식처럼), 타자를 탐닉하느라 자아를 잃었을 때(마치 식탐처럼), 우리는 사람을 굶어야 한다. 고독이라는 처방을 받아야 한다. 그녀의 공간은 관계에서 지친 영혼을 쉬게 하고, 홀로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캔맥주로 목을 축이며 방해받지 않고 채널 독점권을 가질 수 있는 밀실이다. 혼자여서 씁쓸하기도 하지만, 혼자여서 행복하기도 하다. 혼자 사는 인생은 매일매일 그 맛을 바꾸며 감각을 일깨운다. 달았다 하면 쓰고, 썼다 하면 시다. 애초에 그녀가 안온한 삶을 떠나 홀로서기를 갈망했던 그 이유, 만사가 새삼스러운 삶이 지금 여기 있기에 외로움 따위는 가볍게 즐길 경지에 이르렀다. 물론 혼자 사는 삶이 애니메이션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 누군가는 낭만을 꿈꾸겠지만 어차피 낭만이라는 것은 찍어본 적 없는 한 장의 사진일지도 모른다. 특정 장면으로 구체화한 하나의 소망 말이다. 결혼하든 하지 않든, 한 집에 누구와 함께 살든, 인생은 결국 일인용이다. 나는 나와 반려하며, 나를 양육하며, 나를 살아내는 삶. 그것이 진짜 독립생활이 아닐까.

2017-12-04

[이소영의 마음을 읽는 책장]너의 불행은 나의 행복?

선생님의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모범생 친구가 수능을 망치고 듣도 보도 못한 변두리 전문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말로는 “세상에! 어떻게!” 온갖 호들갑을 떨면서 걱정해놓고 돌아서서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친구가 수능을 망쳤다 해서 내 생활이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기분 좋아지는 심리는 뭘까? 친구의 불행에서 느껴지는 행복, 그리고 뒤이어 밀려드는 죄책감. 인정 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에게는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감정이 있다. 이런 종류의 즐거움을 독일어로 ‘샤덴프로이데(shadenfreude)’라고 부른다.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쌤통 심리’라고 할 수 있다. 쉬운 예로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를 보자. 2010년 당시 장문복은 힙합을 좋아하는 진지한 중학생이었지만, 투박하고 어설픈 랩 실력은 원곡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형편없는 실력으로 탈락한 뒤 한동안 장문복을 조롱하는 기사와 댓글이 넘쳐났다. 장문복의 우스꽝스러운 랩 실력을 지켜본 시청자들은 순진하고 재능 없는 소년이 출연해 망신을 당하는데 즐거워한다. 오히려 대부분 시청자는 “내가 해도 저것보단 낫겠다.”고 자기 멋대로 결론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실력으로 덜컥 덤빈 참가자를 한순간 바보로 만들고 조롱하면서 사람들은 쾌감을 느낀다. 실제로 남들의 불행이 우리에게 실질적 이득을 가져다주기에 즐거워할 수 있다. 장문복이 무대 위에서 조롱을 받는 만큼, 그러니까 그의 지위가 ‘낮아진 만큼’ 내 지위는 ‘높아지는’ 반사 이익이다. 이것이 쌤통 심리다. 이런 심리는 비교를 통해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인간의 사회성에서 기인한다. 대학 입학할 때에도 성적이 더 뛰어난 사람이 우선 선발되고, 올림픽에서도 100m 달리기 기록이 더 빠른 사람이 금메달을 딴다. 생존과 번식에 있어 가장 중대하고도 단순한 사실은 다른 개체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태초부터 경쟁과 비교의 숙명을 타고 태어났다. 자기 스스로 타인의 불행을 합리화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에게는 나보다 많이 가진 사람을 아니꼽게 생각하는 심리가 있다. 우리 속담에 아주 적절할 표현이 있다.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부러움과 질투는 한 끗 차이여서 이내 타인이 누리는 정당한 이익조차 부당해 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질투를 인정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종종 혐오, 증오, 분노의 감정으로 질투심을 표현한다.혐오의 가면을 쓴 질투는 조금씩 합당한 이유가 있는 정의롭고 응당한 증오로 변해간다. “부모덕에 잘살면서 나를 무시해? 당해도 싸.” 부러움이 질투로, 또 혐오로 치환되는 대표적인 사례가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이다. 유대인이 독일 경제와 문화를 독식하는 세력으로 떠오르자 히틀러는 그들을 질투했다. 유대인이 미움받아 마땅한 민족이라고 스스로 이해시키고, 질투심을 공유하던 독일인들을 움직여 정의로운 단죄를 감행한다. 내 마음의 음습한 밑바닥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럽다고? <쌤통의 심리학>(사진)을 쓴 리처드 H. 스미스 박사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어서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한다. 당연히 없앨 수도 없는 감정이라고 단언한다. 다만 그 감정이 생겨날 가능성은 줄일 수 있다. 쌤통이라고 고소해 하기 전에 그 사람이 어떻게 그 일을 하게 됐는지 이유를 생각해보는 방법이다. 인간이기에 마음속 저울 한편에는 쌤통 심리와 대등한 공감 능력과 이기적 행동을 금하는 도덕심이 존재한다. 상황에 따라 충분히 양팔 저울의 균형을 조절할 수 있다. 결국, 자존감으로 연결된다. 자기애로 가득 찬 사람은 사회적 기준이 아닌 나의 기준으로 상대를 보기 때문에 쌤통 심리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다. 더불어 내 안의 질투와 쌤통 심리를 솔직하게 인정하면 적어도 치졸한 우월감, 비겁한 열등감 같은 자기만의 함정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2017-11-29

[이소영의 마음을 읽는 책장]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한 기간 중 양국이 발표한 합의 내용을 두고 ‘이면합의론’이 제기됐다. 한국이 필요한 무기 외 불필요하게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기로 이면합의하고, 한미 FTA 재·개정 요구를 무마시켰다는 주장이다. 외국 정상들을 만날 때마다 한국 정부의 빈곤한 외교력이 지적되곤 한다. 외교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협상이다. 그 협상은 주고 받는 이해관계가 분명해야 한다. 되도록 적게 잃고 많이 받는 협상일수록 성공적이라고 평가한다.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박사가 쓴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사진)를 보면 효율적인 협상을 위한 12가지 전략이 등장한다. ‘목표에 집중하라’, ‘감정에 신경 써라’, ‘차이를 인정하라’, ‘가치가 다른 대상을 교환하라’ 같은 내용이다. 쌀로 밥짓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자세히 보면 모두 인간 심리에 기초한 고도의 협상 기술이다. 협상에서 중요한 것은 심리 즉,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상대방의 심리를 파악하기 전에는 갈등을 해소하거나 기회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특히 갖가지 화술과 기술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므로 목표를 잊고 협상 자체에 몰두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고 있다. 과일 음료 판매 업체인 선디아(sundia)의 CEO 브래드 오버 웨이저는 대형 수박 재배 업체들을 찾아가 매장에서 판매하는 수박에 선디아 스티커를 붙여주기만 하면 구매 계약을 맺겠다고 제안했다. 재배 업체들은 아무 비용을 들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선뜻 동의했다. 그 결과 유통 업체들은 과일에 붙어있는 선디아 스티커를 보면서 브랜드를 인식하게 됐고, 2년을 기다린 브래드는 유통 업체들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영업에 나섰다. 이후 선디아 시장 점유율은 단기간에 32%까지 치솟았다. 협상에 포함되지 않은 상대의 요구를 폭넓게 파악해 목표치를 끌어올린 방법이다. 같은 대상이라도 사람마다 매기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양측이 대상에 부여하는 가치의 차이를 알면 적절한 선에서 교환할 수 있다. 교환 대상의 범위를 넓힐수록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찾기가 쉬워진다. 흔히 협상 테이블에 오른 사안들이 많을수록 협상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상식 중 하나다. 사실은 그 반대다. 그만큼 교환할 대상이 늘어나기 때문에 훨씬 유리하다. 그래서 협상을 원할 때에는 가능한 많은 사안을 끌어 모아 주전 선수는 물론 후보, 교체 선수까지 협상 테이블에 올려야 한다. 협상의 기술은 비단 CEO들에게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직원이 회사를 상대로 협상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레바논에서 컨설턴트로 일하는 A는 회사가 임의대로 보너스를 결정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이 말은 결국 보너스가 아주 적거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A는 상사에게 어떤 기준으로 자신의 가치를 계산해줄 것인지 물었다. 회사의 표준을 확인한 다음 지금까지 자신이 회사에 기여한 가치를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거기에는 쿠웨이트의 인맥을 활용해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한 실적이 포함돼 있었다. 결국 A는 3만 달러의 보너스를 약속받았다. 이렇게 회사에서도 항상 표준을 염두에 두고 협상에 임할 필요가 있다. 표준은 부당한 대우나 대접에 맞서는 보호책이 되기도 한다. 협상은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이다. 회사, 가정은 물론 부모 자녀 사이에서도 상대의 마음을 얻는 자만이 승자가 될 수 있다. 아이들은 교환을 좋아한다. 욕조에서 계속 놀고 싶어하는 아이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지금 욕조에서 나오면 내일은 분홍색 입욕제를 넣어줄게.” 라고 제안해야 한다. 세 살짜리도 기꺼이 협상할 의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아이와의 협상도 그리 어렵지 않다. 수험생은 대학 입학사정관의 마음을 얻어야 하고, 취업준비생은 면접관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소비자의 지갑을 열기 위해 몸부림치는 TV속 광고는 말할 것도 없다. 협상이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협상을 잘 하느냐 못하느냐의 상황만 있을 뿐이다. 협상이라는 단어가 너무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들린다면 협상을 ‘의견 교환을 통한 목표달성’으로 이해해보자. 몇 가지 기본 원리만 제대로 알아도 목표달성은 훨씬 쉬워진다.

2017-11-20

[이소영의 마음을 읽는 책장]가짜 빛을 좇는 사람들

시작은 그랬다. 백화점에서 5만엔짜리 화장품을 사려는데 지갑에 2천엔 밖에 없었다. 마침 가방 속엔 고객에게 수금한 예금이 있었다. 잠시만 꺼내 쓰고 금방 채워 넣으면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했고, 그때는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 은행원 우메자와 리카가 잠깐 쓰고 돌려놓으려 했던 돈은 점점 액수가 커졌고, 빚더미는 리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됐다. 급기야는 고객 예금증서를 위조하는 수법으로 야금야금 횡령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횡령한 돈이 1억엔(약 10억원)에 이른다. 리카 부모가 당장 큰 수술을 받아야 했거나, 거액의 빚 독촉에 시달리던 상황도 아니었다. 그저 내연남과 밀회를 즐기고, 명품을 쇼핑하는데 모두 썼을 뿐이다. 어쩌다 리카는 양심 없는 범죄자가 됐을까? 가쿠다 미쓰요 작가가 쓴 ‘종이달’(사진)은 리카의 회상을 중심으로 리카와 알고 지냈지만,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친구 세 명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리카의 욕망은 가난한 대학생 고타를 만나면서 폭발한다. 돕고 싶어 고객의 돈에 손을 대기 시작한 뒤 자신이 어디에 어떻게 돈을 쓰는지, 돈을 쓰고 기쁜지 슬픈지조차 무감각해진 순간, 리카는 더는 자신이 있을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돈이라는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어째서인지 보이지 않게 된다. 없으면 항상 돈을 생각하지만, 많이 있으면 있는 게 당연해진다. 100만엔이 있으면 그것은 1만엔이 100장 모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 처음부터 있는, 무슨 덩어리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은 부모에게 보호받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그것을 누린다. 리카가 이렇게 폭주하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가부장적인 남편은 은연 중에 경제적 우월감을 드러낸다. 자신에게 붙어 기생하는 존재였던 아내가 파트 타임 은행원으로 취직해 계약직까지 승진하자 자신이 더는 경제적 주체가 아니라는 현실이 탐탁지 않다. 하지만 12살 연하 내연남 고타는 달랐다. 고타는 엄마를 찾는 아이 같았다. 고타 앞에서 돈을 펑펑 쓰면서 리카는 존재 의미를 찾았다. 누군가에게 내가 필요한 존재가 됐다는 사실이 기뻤다. 모든 쾌락에는 벽에 부딪히고 싶어 하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공존한다. 이 위험한 폭주가 언젠가는 절벽으로 곤두박질칠 것이라는 것을 리카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돈이 주는 아찔한 평온함을 거부할 수 없었다. 돈이 많으면 세상 사람들이 친절하게 느껴진다. 리카에게 거액을 정기 예금하던 부유한 노인들은 돈이라는 것으로 폭신폭신하게 둘러싸인 세상에 산다. 레스토랑에서도 바에서도 백화점에서도 부티크에서도, 그들을 맞이해주는 사람들은 웃는 얼굴이 끊이지 않았다. 아주 친절하게, 농담 한두 마디를 섞어서 진심이 담긴 인사를 해주었다. 거기에는 악의도 경멸도 오만불손함도 없고, 그저 포근한 선의만이 있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그들의 삶을 리카도 공유하고 싶었다.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리카는 횡령범이 되지 않았을까? 은행이 아닌 타운지 편집회사에 취직했더라면, 고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지금쯤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을까? 수 많은 선택지 중 다른 답안을 골랐다 할지라도 리카의 삶이 마냥 평온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곪을 대로 곪은 그녀의 친구들처럼 말이다. 소설의 배경은 90년대 초반. 이야기 흐름은 일본 버블 경제 붕괴 과정을 따라 이동한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부동산 시장에 몰려들었다가 실패하고 돌아선 사람들의 피폐한 모습을 리카의 은행 업무에 투영한다. 점점 쇠락해가는 경기 속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청년들, 사소한 빈부의 격차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여자들의 심리적 갈등이 마치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듯 선연하게 드러난다. 동시에 돈을 향한 탐욕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소설 제목이 왜 ‘종이달’일까? 옛날 일본 사진관이 성업하던 초기에는 초승달 모양의 가짜 달을 걸고 서정적인 분위기의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종이달’은 연인이나 가족과 보낸 가장 행복했던 때를 비유하는 단어가 됐다. 소설에서 리카의 ‘종이달’은 이제는 가질 수 없는 덧없는 시간, 허영과 위선으로 가득했던 그때가 아니었을까. 이소영 / 언론인, VA거주

2017-11-20

[마음을 읽는 책장] 고전에서 ‘현재’를 읽다

어느새 두 장 남은 달력.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늘 같은 말을 중얼거린다. “벌써 11월이네. 벌써 한 해가 다 갔고, 나는 또 나이를 먹네.” 꼬박꼬박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이제는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것쯤이야 익숙할 법도 한데 아직도 시간의 흐름이 어색하기만 하다. 매 순간 나이 들어가지만 그 사실을 잊고 살다 연말이 돼서야 한탄하는 이유는 뭘까? 나쓰메 소세키 작가의 소설 ‘마음’(사진)에 등장하는 ‘선생님’은 책에 흥미를 잃어버린 이유를 늙어감에서 찾는다. 아무리 책을 읽어도 그만큼 훌륭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전에는 사람들 앞에 나선다거나 사람들의 질문을 받고 모르면 수치인 것 같아 거북했는데, 요즘은 모른다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선생님은 늙어가면서 스스로 타협하는 법을 익혔다. ‘나’는 휴양지에서 우연히 ‘선생님’과 만난다. 스승과 제자 사이도 아닌데 부를만한 호칭이 마땅치 않아 선생님이라 부른다. 선생님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지만 직업이 없다. 아예 무슨 일이라도 할 생각조차 없다. 그렇다고 책을 열심히 읽거나 글을 쓰지도 않는다. 주체적으로 세상을 살아갈 의욕도 없고, 비뚤어진 세상에 대해 날 선 비판도 않으면서 인간에 대한 혐오감만 드러내는 선생님. 나는 언제나 선생님 머릿속이 궁금했다. 슬그머니 왜 이렇게 사는지 여쭙지만 돌아오는 답은 애매했다. 그러다 나는 선생님이 보낸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거기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선생님의 과거가 적혀있었다. 선생님이 고향을 떠나 도쿄 하숙집에 머물 때 예쁜 하숙집 딸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친구 K가 하숙집 딸을 사랑한다고 속내를 털어놓을 때 자신이 먼저 사랑하고 있다는 걸 말하지 못한 채 선생님은 속으로 끙끙 앓기만 한다. 하숙집 딸을 뺏기고 싶지 않아 친구 K의 치명적인 약점을 건드려 배신을 맛보게 한다. 그 결과 친구 K는 세상을 등지고 만다. 결국 하숙집 딸과 결혼하지만 이후 지독한 자기비하에 빠진다. 아내에게 사정을 설명하지도 못하고, 한 달에 한 번 죽은 친구의 무덤을 다녀올 뿐이다. 선생님은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친구도 없는 고독한 사람이다. 거짓말로 친구를 죽음에 몰아넣고 여자를 가로챘다는 죄책감 때문이라 하기에는 평생 지고 온 대가가 너무 크다. 선생님의 어린 시절을 되짚어보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어릴 때 부모가 돌아가시고 어린 조카를 대신해 재산을 관리하던 숙부가 재산을 탕진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선생님은 본능적으로 "아무도 믿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선생님은 지독한 자기방어적 삶을 살게 된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인정하는 일은 대단히 힘들다. 사람은 보통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왜곡해 바라보며 자기부정을 반복한다. 누구나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싶어 한다. 내 약점이 누군가에게 들킬까 걱정해 평생 가면을 쓴 채 살기도 한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 선생님은 오히려 용기 있는 사람으로 비친다. 겉으로는 세상을 등진 패배자로 보이지만 어쩌면 가장 강하고 적극적인 인물일 수도 있다. 숙부에게 속은 사건,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건을 겪으면서 선생님은 타고난 악인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평소에는 모두 다 좋은 사람들, 최소한 보통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차하면 악인으로 바뀐다는 것을 자신의 경험에서 깨달았다. 이후 무기력한 삶을 산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게 선생님식 자기반성이었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10년대, 메이지(明治)라는 한 시대가 저물어가던 시절이다. 급속한 근대화 물결 한복판에서 아직 순수하기에 인간에 대해 믿음이 남아 있는 대학생 ‘나’와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선생님’의 모습은 당대 일본의 지식인들과 닮아있다. 특히 자신의 행동을 윤리에 반한다고 여기고 결국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행동은 ‘윤리’를 추구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한다는 ‘메이지 정신’의 한 모습으로 귀결된다. 나쓰메 소세키 작가는 메이지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지만 백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와도 닿아 있다. 믿고 의지했던 사람의 배신 이후 아무도 믿지 못하는 ‘신뢰’에 대한 거부감, 친구의 여자를 가로채고 죽음으로 몰고 간 인간의 이기심, 죽기 전에 단 한 명이라도 믿고 속마음을 터놓고 싶었던 ‘관계’에 대한 욕구는 수많은 사람이 겪는 문제이기도 하다. “자유와 독립과 자기 자신으로 충만한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 이 외로움을 맛봐야 하는 거겠지.” 소설 속 선생님의 처절한 자기 고백이 유난히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이소영/언론인, VA 거주

2017-11-05

[마음을 읽는 책장]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이 가을에 어울리는 달달한 연인들의 사랑 고백 같지만 사실 이 말은 수십 년 전 떠나보낸 딸을 그리워하는 어미의 절절한 마음을 담은 편지 내용이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사진)은 돌이 채 되기 전에 미국으로 입양된 카밀라의 이야기다. 고향 진남에 출생과 엄마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깊은 심연을 용기 있게 날아온 카밀라 포트만. 까만 머리, 둥글넓적한 얼굴을 가진 그녀가 왜 카밀라인지 물어도 “카밀라는 카밀라니까 카밀라인 거지”라는 무책임한 대답 말고는 들을 수가 없다. 양부에게 건네받은 사진에는 앳된 여자가 어린아이를 안고 있었다. 사진 한 장을 갖고 카밀라는 과거를 찾기 시작한다. 여자가 살았다는 진남에 도착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약속한 듯 카밀라를 피한다. 어렵게 들은 친부모에 대한 이야기는 섬뜩하다. 친오빠의 아이를 낳았다는 추악한 소문에 휩싸인 채 모두의 외면 속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이를 입양 보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 소문은 어린 소녀들 사이의 사소한 질투심에서 시작된 거짓말이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결국 엄마는 아이를 입양 보내고 외롭게 바닷속으로 몸을 던지고 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가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이다. 바다에 던져진 시신처럼, 모든 감춰진 이야기 속에는 스스로 드러나려는 속성이 내재한다. 그러므로 약간의 부력으로도 숨은 것들은 표면으로 떠오른다. 진실은 개개인의 욕망을 지렛대 삼아 스스로 밝혀질 뿐이다. 카밀라가 진실에 다가설수록 감당할 수 없는 사실들이 그녀를 괴롭히지만 멈추지 않고 심연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나라는 존재, 내 인생. 엄마가 나를 낳아서 내가 존재할 수 있었다면, 이제 내가 엄마를 생각해서 엄마를 존재할 수 있게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알려고 집요하게 파고들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하다. 진실을 모르고 엄마를 그리워하며 사는 편이 훨씬 행복할 수도 있다. 때로는 진실이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깨뜨리기도 한다. 카밀라 또한 그 사실을 잘 안다. 진실을 향해 달려갈수록 그것을 감추려 눈을 감았던 ‘우리’라는 존재의 나약함과 비겁함이 반대편에서 튀어 오른다. 어렸기에 나약했고, 지킬 것이 많아 비겁했던 ‘우리’는 각자가 알고 있던 진실에 대해 조금씩 말하기 시작한다.그렇게 기억의 조각이 합쳐져 25년 동안 묻어왔던 엄마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결국 카밀라의 친아빠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답을 해줄 엄마가 이미 오래전 바다에 몸을 던진 상황이라 당시 여러 사람의 오해와 불신이 만든 비극이었다는 것 정도만 밝혀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한다.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 닿을 수 없다. 타인에게는 내가 짐작할 수 없는 아득하고 깊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거기서 멈춰 서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소설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에게는 서로가 건너기 힘든 아득한 심연이 있고, 바로 그래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은 우리의 일일 터. 소설 속에서 카밀라와 엄마는 바닷속에서 만난다. 통영의 신라 시대 이름인 진남 바다에서 열일곱 어머니와 스물넷의 딸은 그렇게 조우한다. 불완전한 소통조차 존재하지 않는 검은 바다가 서로를 잇는 오작교 역할을 한 셈이다. 엄마가 말한다. “25년 전의 나는 너라는 날개를 품은 행복한 사람이었다.” 바닷속에서 엄마 얼굴을 본 카밀라는 엄마의 자취에 머무르며 그때의 엄마와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누군가의 상황과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날개가 있다면 심연 위를 훌훌 날아 상대방의 본심에 가 닿을 수 있겠지만, 날개가 없는 인간이기에 무한히 노력할 수밖에 없다. 결국 그 과정은 사랑으로 귀결되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할 테니까. 이소영/언론인, VA 거주

2017-10-16

[마음을 읽는 책장] 내 마음속 ‘오두막’

영국 배우 데임 플로라 롭슨은 “자신이 하는 일에 신의 은총을 구하라. 그러나 신께 그것을 대신 해달라고 요구하지는 마라.”고 말했다.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신에게 마음속으로 도움을 청할 수는 있지만 그 일은 신이 아닌,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명언이다. 곤경에 처했을 때 당연하다는 듯이 신을 찾고, 처음에는 부탁으로 시작했던 기도가 이내 구걸, 협박, 떼쓰기로 변질한다. ‘이번 일만 잘 되게 해주면 남은 인생 평생 보답하며 살겠다고.’ 하지만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세상에 신이 있기나 한 거냐’고 쉽게 원망하기도 한다. 윌리엄 폴 영 작가의 소설 ‘오두막’(사진)에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가족여행 중 사랑하는 딸을 잃고, 슬퍼하는 남자에게 어느 날 편지가 한 통 배달된다. 편지는 가족이 마지막으로 캠핑했던 그 오두막으로 남자를 초대하는 내용이었다. 보낸 이는 ‘파파’다. ‘파파’는 아내가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남자는 오두막에 가면 혹시 딸을 죽인 살인범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정말 절대적인 존재인 하나님이 부른 것일까 궁금해하며 오두막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정말 ‘파파’라 불리는 여자가 있었다. 남자가 파파에게 묻는다. “말씀하신 그분이라면, 제가 필요로 할 때 어디 계셨죠?” 파파가 대답했다. “자신의 고통만 볼 땐 날 못 보는 법이네.” 소설 속에서 삼위일체의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인간의 형태로 출현한다. 보통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며 남성화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남자일까? 그동안 단단한 고정관념이 작용해 의심의 여지도 없이 남자라고 여겼는지 모른다. 소설에서는 ‘하나님’을 요리를 즐기는 사려 깊은 흑인 여성의 모습으로 그린다. 예수는 중동에서 온 남자, 그리고 성령은 아시아 여성이다. 소설 ‘오두막’은 삶을 살면서 언제나 마주하게 되는 질문,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에 신은 도대체 어디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슬픔, 상처를 간직한 ‘오두막’이 있을 것이다. 딸을 잃은 슬픔에 잠긴 아버지가 이끌려 찾아간 곳은 바로 자신의 딸이 납치돼 살해되었던 오두막이었다. 그 안에서 남자는 스스로 짓고 부수고를 반복했던 자신의 고통과 마주한다. “이런 비극이 왜 하필 죄 없는 나에게 일어나느냐”고 원망하던 남자는 성부, 성자, 성령 앞에서 충분히 자신의 감정을 폭발시킨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간 남자는 마음 한쪽에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상처가 컸다. 그래서 자신만큼은 아버지처럼 무능력하고 폭력적인 남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도 그는 딸을 지키지 못한다. 그 상처는 자신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남은 가족까지 괴롭게 한다. 그러다 남자는 파파와 커피를 마시고, 예수님과 산책을 하거나 사라유와 정원을 가꾸는 등 공허한 내면을 조금씩 기쁨으로 채워가는 방법을 배운다. 사랑하는 딸을 잃은 상실감, 범인을 증오하는 마음, 딸을 살인자로부터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의식,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한 원망. 모두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지만 대신해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결국 이 감정들을 극복하고 견뎌야 하는 것은 오롯이 본인 몫이다. 이 버거운 감정들을 주체하지 못해 누군가는 제 마음을 속인 채 괜찮은척하기도 한다.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기도했다고 하여 가만히 앉아 신의 힘으로 해결되기만을 바란다면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소설 속 남자는 보이지 않는 신을 향해 허공에 맴도는 기도만 하는 대신 오두막을 찾아가 무엇이라도 했다. 소설 ‘오두막’은 파산에 직면한 가장이 여섯 자녀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쓴 소설이었다. 값비싼 선물 대신 삶의 경험이 묻은 이야기책을 아이들이 재미있게 읽어주길 바랐다. 정식으로 책을 출간하기 위해 여러 번 출판사 문을 두드리기도 했지만,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 주제가 종교적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 결국 자가출판 형식으로 출간해 오로지 웹사이트에서만 판매를 시작했다. 그런 소설이 오늘날 세계 46개국에 번역본이 출간되고, 영화로 각색된 힘은 무엇일까? 소설 ‘오두막’은 예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를 떠나 마음속 감정에 집중하고, 스스로 치유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감정을 정직하게 털어놓고 같이 공감할 관계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소영/언론인, VA거주

2017-10-02

[마음을 읽는 책장] 기억은 언제나 윤색된다

예전에 참 맛있게 먹은 음식이 생각나 그 식당을 다시 찾았을 때 그저 그런 맹숭한 맛에 크게 실망하고 돌아섰던 기억. 학창시절 짝사랑하던 선생님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인 줄 알았는데 몇 년 뒤 졸업앨범을 들춰보니 시커먼 한 마리 산짐승 같아 보였던 기억. 그 식당 음식이 세월의 풍파를 맞으면서 맛이 변한 것도 아니고, 선생님이 졸업앨범 사진을 찍는 그 날 하필 산짐승처럼 꾸미고 왔을 리도 없다. 음식 맛과 선생님 얼굴은 원래부터 그랬다. 그런데 내 머리가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추억은 어떤 식으로든 미화된다. 특히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머릿속에서 유리하게 편집해 아름다운 기억으로 저장한다. 줄리언 반스 작가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사진)는 기억과 착각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은 한 통의 편지로 시작한다. 환갑의 토니 앞으로 베로니카 어머니가 보낸 편지 한 통이 배달된다. 500 파운드(100만원가량)와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남긴다는 유언장이었다. 진실을 알기 위해 토니는 베로니카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40년 전, 토니와 에이드리언, 베로니카 사이의 얽힌 인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대 초반, 토니와 베로니카는 연인이었다. 헤어진 후 베로니카는 토니의 고등학교 친구인 에이드리언과 사귀게 된다. 토니는 아무렇지 않게 둘 사이를 축복하는 편지를 보냈다. 몇 개월 뒤 에이드리언이 욕실에서 동맥을 긋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제는 환갑이 된 토니가 기억조차 희미한 옛일들을 하나씩 떠올리면서 흩어져있던 기억의 조각이 하나씩 자리를 잡아간다. 여기서부터 토니는 지금까지 자신이 기억한다고 믿었던 과거가 사실은 머릿속의 장난질로 비틀린 기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은 스스로 써 내려간 소설이었다. 베로니카와 그녀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 에이드리언에게 보낸 편지 모두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왜곡한 소설이었다. 토니가 기억하기로는 나는 그저 평범한 아이였고, 친구에게 전 여자친구를 뺏기는 억울한 피해자이며, 그런데도 어쩔 수 없었던 유약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을 축복하는 내용인 줄만 알았던 그의 편지 내용은 졸렬하기 그지없었다. 바람난 남녀가 아이를 낳아 대대손손 고통을 물려받길 바란다는 끔찍한 저주가 섞여 있었다. 더 소름 끼치는 것은 지난 40년 동안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이유로 그 저주가 그대로 실현됐다는 사실이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기억을 꾸며낸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우리는 살면서 좌충우돌하고, 대책 없이 삶과 맞닥뜨리면서 서서히 기억의 창고를 지어간다. 인생의 토대에 더하고 또 더할 뿐이다. 더하는 것과 늘어나는 것은 다르다. 더하면 늘어나는 게 당연한 것 같지만 기억창고 안에서는 기억을 블록쌓기처럼 차곡차곡 더하지 않는다는데 함정이 있다. 작가는 책에서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진 확신’이라고 정의했다. 개인의 삶이든 역사든 오류를 반복할 수밖에 없고 교훈을 통해 전진한다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는 설명이다. 토니와 역사 선생님이 나눴던 대화가 인상 깊다. 10대인 토니는 “역사는 승자가 남긴 기록”이라고 답했고, 시간이 지난 후 환갑의 토니는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이소영/언론인, VA 거주

2017-09-25

[마음을 읽는 책장] 가장의 이름으로

여권을 만들자마자 제일 처음 갔던 해외 여행지가 중국이었다. 장가계 같은 유명 관광지를 돌고, 마지막 날 일정이 상해 도심 관광이었다. 그날, 상해라는 도시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하늘 높이 쭉쭉 뻗은 매끈한 고층 빌딩 숲 속에서 아찔한 기분을 느낀 것도 잠시, 빌딩 후문으로 돌아갔다가 또 다른 세계를 만났다. 빌딩으로 둘러싸인 방어벽을 넘자마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잣집이 나타났다. 판잣집 창문 사이로 빨랫줄이 길게 삐져나와 있었고, 발길에 채는 요강은 찰랑거리고 있었으며, 아직 연탄을 때는지 연통에서 매캐한 연탄가스 냄새가 났다. 불과 십 여분 만에 2000년대와 70년대를 오간 기분이었다.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성장한 중국의 단면이었다. 위화 작가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사진)는 대외적으로 보이는 중국의 화려함이 아닌 후미진 뒷골목에서 살아가는 중국 서민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허삼관은 마을 방직공장에서 일하며 근근이 생계를 꾸려간다. 피를 팔아야 건강을 증명하고 돈도 벌 수 있다는 말에 생애 처음 피를 팔고, 그 돈으로 마을에서 제일가는 미인과 결혼한다. 이후 허삼관은 삶에서 고비를 맞을 때마다 피를 팔아 해결한다. 큰아들이 옆집 아이를 때려 치료비를 물어줘야 할 때도 피를 팔아 돈을 얻었고, 흉년에 옥수수죽으로만 연명해야 하는 가족에게 국수를 사 먹일 때도 피를 팔아 돈을 얻었다. 80년대 말, 마약 정맥주사와 동성애 문화가 밀려들자 중국 정부는 에이즈 예방을 위해 수혈 관련 제품의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이내 중국에서는 채혈을 통해 돈벌이하는 혈액은행이 생겨났고, 당시 혈장(血漿) 경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채혈은 중국 하층민의 주요 돈벌이 수단이었다. 한 번에 400cc의 피를 팔면 35원을 받는데 반년 동안 쉬지 않고 농사를 짓는 것보다 많은 돈이다. 피를 팔러 가는 날이면 허삼관은 몸속 피를 늘리기 위해 ‘배가 아플 때까지, 이뿌리가 시큰시큰할 때까지’ 물을 마신다. 오줌보가 터질 때까지 오줌을 참고, 피를 뽑고 난 뒤에는 반드시 보혈과 혈액 순환에 좋다는 볶은 돼지 간, 데운 황주를 먹는다. 허술하기 그지없는 허삼관이어도 생활비를 벌기 위한 매혈에는 이토록 치밀했다. 국공합작과 문화혁명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가족들 먹여 살리기 위해’ 기꺼이 몸을 파는 남자의 매혈기는 애처롭다. 사정이 급할 때는 한 번 피를 뽑으면 석 달은 쉬어야 하는 나름의 규율을 어기고 사흘 만에 또 피를 팔기도 한다.이 남자에게 시대와 상황은 너무나도 폭력적이었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가장이기에 가족을 지키려면 자신을 갉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소설에서 허삼관은 모두 아홉 번 피를 파는데, 마지막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족을 위한 매혈이다. 허삼관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세상은 급변해 이제는 피를 팔아도 얻을 수 있는 돈이 얼마 되지 않는 시대가 됐다. 게다가 허삼관같이 늙은이의 피는 잘 사 주지도 않는 시절이 와서야 남자는 생애 처음 자신을 위해 피를 판다. 이렇게 피를 파는 허삼관의 모습은 가장이기에 더욱 비장하게 느껴진다. 시대가 여러 번 바뀌어도 삶은 여전히 무겁다. 우리 곁에도 수많은 허삼관이 있다. 피를 팔아 살아간다는 점에서 허삼관에게 피는 노동력이고 돈이었지만, 다른 가장들은 땀, 신용, 자존심을 팔아 가족을 먹여 살린다. 신용을 팔아 대출받고, 그 돈으로 자식들 공부 가르치고 집을 산다. 허삼관이 피를 판다고 마냥 애처롭게 볼 일이 아니다. 요즘 세상에 신용 안 판 가장은 없을 테니 집집이 허삼관 한 명씩 있는 셈이다. 들여다보면 대단히 씁쓸한 주제이지만, 소설은 시종일관 익살스럽다. 허삼관네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삶이 한 편의 시트콤(situation comedy)처럼 묘사돼있다. 노동과 빚으로 꾸려가는 팍팍한 삶이어도 매일 어둡지만은 않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소영/언론인, VA 거주

2017-09-11

[마음을 읽는 책장] 인생은 실패와 좌절의 연대기

이소룡이 말했다. “산다는 것은 그저 순전히 사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여기 이소룡을 흠모하는 소심하고 외로운 남자가 있다. 현란한 쌍절곤 무술에 심취해 그 역시 이소룡처럼 높은 곳의 별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할아버지가 밖에서 낳아 온 서자 신분으로 공기조차 당당하게 들이켤 수 없는 눈칫밥 인생이다. 태생부터 원조가 될 수 없었던 남자의 운명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모방과 아류, 표절과 이미테이션, 짝퉁 인생으로 흘러가게 된다. 천명관 작가의 ‘나의 삼촌 브루스 리’(사진)에는 이런 안쓰러운 운명을 가진 남자가 등장한다. 이야기는 ‘나’의 시선으로 70년대부터 2000년까지 훑으며 삼촌의 일대기를 들려준다. 70년대는 다들 뭔가에 매혹된 시대였다. 온 국민은 독재자와 슬레이트 지붕에 매혹되었고, 독재자는 수출과 젊은 여자에 매혹되었으며, 젊은이들은 팝송과 이소룡에 매혹되었다. 당시 많은 10대가 그러했듯 삼촌도 ‘정무문’ 영화에 가슴 설레하던 평범한 사내였다. 쌍절곤을 휘두르다 뒤통수 한 번 안 맞아본 남자가 있었던가? 이소룡 같은 강한 주먹과 찰고무처럼 질긴 근육을 갖고 싶어 뒷동산에서 홀로 무술을 연마하다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액션 영화 스턴트맨으로 출연하게 된다. 그즈음 삼촌 오토바이 뒤에 올라타 삼촌에게 순정을 바친 여고생이 임신 소식을 알리고, 삼촌이 결혼을 거부하자 같이 죽자며 청산가리를 마신다. 이 일로 삼촌은 지명수배자가 되어 서울 충무로에서 중국집 배달을 하며 숨어 지낸다. 태생부터 꼬였던 삼촌의 꽈배기 인생은 이게 다가 아니다. 이후 어렵게 번 돈을 몽땅 도둑맞고, 이소룡 대역을 뽑는 영화사 오디션은 밀항선이 고장 나는 바람에 홍콩 언저리까지 갔다 되돌아와야 했다. 지역 조직폭력배들과 몰려다니며 주먹질을 하던 와중에 신군부의 비상계엄 발령에 휩쓸려 삼촌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게 되는데…. ‘불운 올림픽’이 있다면 한국 국가대표로 당당히 출전해 세계 무대에서 금메달을 따고도 남을 삼촌의 혹독한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이 세상 전체가 삼촌을 따돌리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이다. 70년대 산업화를 지나 80년대 군부독재와 민주화 혁명, 90년대 본격 자본주의 시대로 흘러가는 과정에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논을 매고 소여물 주는 것이 일상이던 고향 마을이 대단위 공업단지로 바뀔 정도이니 말이다. 그 속에서도 삼촌은 변한 것 없이 바보스럽게 순수했다.그래서 더 많이 다쳤는지도 모르겠다. 부서지고 깨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살아가는 일, 그것이 바로 인생일 터인데 삼촌도 그랬다. 이소룡처럼 영웅도, 주인공도 되지 못했지만, 인생의 구석진 곳을 떠돌며 꾸역꾸역 살아남아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모두 증명해주었다. 꿈이 있었지만 살면서 우여곡절을 겪다 보니 그 꿈은 우스꽝스러워지고, 무언가 이룬 것도 없이 실패한 경험만 한 가득한 인생. 주연은 고사하고 조연은 커녕, 단역도 아닌 엑스트라로 전락한 처지의 ‘나의 삼촌 브루스 리’를 보여줌으로써 천명관 작가는 삶이라는 건 원래 이렇게 고단한 것인데, 그래도 한번 살아볼 만은 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희극이든 비극이든 말이다. 천명관 작가는 소설을 쓰기 전에 영화 시나리오로 먼저 데뷔했던 작가다. 그의 장기는 소설 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는데, 마치 잘 짜인 시대극 한 편이 눈앞에서 상영되는 듯 생동감 있는 묘사가 압권이다. 그래서인지 눈으로는 소설을 읽으면서도 머리로는 영화적 상상을 하게 된다. 여기에 대해 작가는 소설이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아마도 가장 느리고 완곡한 형태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작가의 말로 칼럼을 마무리할까 한다. “어쩌면 모든 소설은 결국 실패담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소설을 읽는 이유가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것이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하더라도, 그리고 구원의 길을 보여주진 못하더라도 자신의 불행이 단지 부당하고 외롭기만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래서 자신의 불행에 대해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된다면 그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이소영/언론인, VA 거주

2017-08-28

[마음을 읽는 책장]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

 만약 내 아이가 뇌성마비 장애로 몸의 어느 부분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면 그것을 지켜보는 심정은 어떨까? 매일 극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호흡기에 의지해 연명하는 아이를 보고 있자면 그 아이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까? 태어날 때 뇌에 손상을 입어 자신의 의지로는 손가락 하나, 눈동자 하나 마음대로 못 움직이지 못하는 뇌성마비 소년 숀 맥다니엘이 있다. 공식적인 아이큐는 1.2에 불과하다. 음식을 받아넘기기도 힘들다. 하루에 몇 번씩 발작을 일으킨다. 세탁기가 갑자기 중심을 잃고 들썩거리며 쾅쾅쾅 소리를 내는 것처럼. 숀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있다. 5살 이후에 본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억할 수 있는 놀라운 기억력을 갖고 있다. 어렸을 때 숀은 누나와 ‘선생님 놀이’를 하면서 책 읽기를 배웠다. 텔레비전, 라디오, 가족들의 대화가 그의 선생님이다. 물론 그 놀이는 모두 누나가 일방적으로 떠들고, 숀은 반응 없이 가만히 듣는 방식이었다. 숀이 14살이 됐을 때, 아빠가 그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더 비극적인 것은 아빠가 그런 계획을 세운 이유가 그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는 뇌성마비 장애우 숀의 시선으로 풀어나가는 소설이다. 비참하도록 암울한 상황이어도 숀은 14살 특유의 재기발랄한 매력을 발하면서 솔직 담백하게 자신을 고백한다. “쓸모없는 몸뚱이 안에 갇혀 있는 게 어떤 느낌이냐고? 그걸 말이라고 해? 좌절감을 느껴 본 적이 있냐고? 지금 누구 놀려!” 숀이 늘어진 팔다리에서 유일하게 자유를 맛보는 순간이 하루 몇 번의 발작이다. 발작이 일어날 때면 숀은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그의 몸을 벗어나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다. 타닥타닥, 타닥 발작이 일어나면 숀은 육체를 벗어나 하늘을 날거나 솟구쳐 오르거나 시공을 가로질러 누비고 다닌다. 가족들은 악마의 손에 놀아 나는 듯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고통스러워하지만 숀의 머릿속에서는 그 누구보다 찬란하고 역동적인 14세 소년의 삶이 펼쳐지고 있다. 누나의 친구 앨리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데이트를 즐기는 그런 상상 말이다. 그에게는 발작이 기쁨이고 살아있다는 방증이다. 이야기 속에는 두 아빠가 등장한다. 한 명은 아이의 고통스러운 발작을 보다 못해 아들의 얼굴에 베개를 덮어씌운다. 이후 아버지는 살인죄로 감옥에 들어간다. 나머지 한 명이 숀의 아버지다. 아들의 이야기로 시를 써 퓰리처상을 받고 유명해지지만, 아이의 고통을 볼 수 없어 그 책임을 아내에게 떠넘기고 집을 나가버린다. 숀의 아빠는 가정을 포기할 만큼 아들의 고통이 힘들었다. 남들이 보기에 숀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런 상태로 평생을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숀의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는 누군가가 끝내줘야 하지 않나 고민을 거듭한다. 아들의 고통을 끝낼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고. 설령 그 일이 용서받지 못할 범죄라 할지라도. 언뜻 보면 아들을 살해하려는 무정한 아버지 같아도 자세히 보면 아들을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를 찾아내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아빠의 절절함이 읽힌다. “나는 죽기 싫어요.” 뇌성마비, 식물인간, 저능아인 나에게도 삶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숀의 목소리에서 아들이 살아있어야 하는 그 절실한 이유를 찾아내려고 발버둥 치는 아빠가 보였다. ‘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를 쓴 테리 트루먼 작가에게도 숀과 같은 아들이 있다. 부모와 의사소통조차 할 수 없는 아들을 보면서 ‘저 아이에게 인생이란 어떤 의미일까’를 물었다. 이 소설 속의 숀처럼 작가의 아들 역시 숨겨진 천재일지, 감자 칩과 로큰롤을 사랑하는 재치꾸러기 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들의 정신세계는 의사조차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뇌성마비 장애우에게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아빠가 무슨 권리로 아들을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를 결정한단 말인가. 사랑에는 당연히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과연 그 책임의 한계는 어디까지일지 생각해본다. 죽음으로써 아이를 해방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까지도 부모의 책임에 포함되는 것인지.

2017-08-21

[마음을 읽는 책장] 다를 뿐 비정상은 아니다

그녀의 직업은 편의점 직원이다. 처음 편의점 문을 열었을 때부터 18년 동안 파트 타임으로 일하면서 8명의 점장과 셀 수 없이 많은 직원들을 배웅해왔다. 그녀가 36살이니까 일생의 절반은 편의점에서 보낸 셈이다. 학생은 방학 동안 용돈 벌이를 위해, 주부는 낮에 아이 학원비를 벌기 위해, 구직자는 지원한 회사에 합격할 때까지 잠시만 머물다 떠난다. 그런 편의점에서 어쩌다 그녀는 장기 근속하게 된 걸까? 소설 ‘편의점 인간’(사진) 주인공 후루쿠라는 사람들이 말하는 ‘정상적인’ 기준에 한참 겉도는 사람이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세상의 이물질 취급을 받았다. 죽은 참새를 보고 그저 아빠가 꼬치구이를 좋아하니까 “구워 먹자”고 말한 것뿐이고, 싸우고 있는 아이들을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말리기 위해 삽으로 머리를 후려쳤을 뿐이었다. 그런 후루쿠라를 두고 사람들은 “분명 가정에 문제가 있다”면서 가족까지 비난하고 괴롭혔다. 그래서 그녀는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기로 했다. 사회에 섞이는 시늉이라도 하려고 그녀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선택했다. 물건을 배치하는 순서와 위치, 계산, 인사법 등 편의점 일은 완벽한 매뉴얼이 있어서 그것 대로만 움직이면 꽤 괜찮은 부품으로 취급받을 수 있었다. 편의점은 그녀를 정상인처럼 보이게 해줬다. 다만 매뉴얼 밖에서는 어떻게 하면 보통 인간이 될 수 있는지 여전히 헷갈렸다. 어느 날 편의점에 그녀와 똑 닮은 30대 중반의 모태솔로 시라하가 찾아온다. 그 역시 사회 규격에 맞춰지지 못한 낙오자였다. 각자 편의를 위해 둘은 동거를 시작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평범한 것’에는 모두 수치가 있다. 스무 살이 되면 대학을 가고, 졸업하면 취직을 하고, 직장생활 3년쯤 하면 결혼해서 아이 낳는 과정을 순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남자는 표준화된 규격에서 벗어났다 해서 인간을 간단히 강간해버리는 사람들로부터 숨기 위해, 여자는 계속 보통 인간의 탈을 유지하기 위해 전략적 제휴를 맺지만, 그마저도 삐걱거린다. 어떻게 해서든 표준화된 수치에 안착하기 위해 애쓰는 그들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인다. ‘편의점 인간’을 쓴 무라타 사야카 작가 역시 18년째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이 소설에는 자신의 이야기가 많이 녹아 있다. 작가는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다 이야기를 시작하게 됐다고 밝혔다. 세상이 요구하는 어느 정도의 매뉴얼대로 살기 위해 대부분 사람은 서로를 흉내 내고 때론 거짓말도 하며 산다.그런 보통 인간인 척하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나는 다르지만, 비정상은 아니다”고 외친다. 소설은 한마디로 ‘평생 비정상으로 낙인 찍혀 사는 여자의 정상되기 프로젝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프로젝트는 실패한다. 후루쿠라는 밑바닥 중의 밑바닥이고, 이제 자궁도 노화되었을 테고, 성욕 처리에 쓸 만한 외모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남자 못지않게 돈을 벌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기는커녕 정식 사원도 아닌 알바생이다. 무리가 보기에는 짐일 뿐이다. 서른 중반이 되고 보니 이런 자신의 처지가 위태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회사에 취직하려고도 해봤다. 후루쿠라는 결국 회사 면접시험을 포기하고 편의점에 다시 취직한다. 편의점에 있을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생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고대부터 무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은 삭제돼 왔다. 사냥하지 않는 남자, 아이를 낳지 않는 여자는 무리에서 추방당했다. 사냥과 출산은 시대가 바뀌면서 취직과 결혼으로 역할이 바뀌었다. 취직, 결혼하지 않은 젊은이들은 남들의 수군거림과 손가락질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 굳이 취직과 결혼이 아니어도 본인은 충분히 행복한데도 사람들은 제멋대로 실패한 인생이라 재단한다. 그런 이목이 부담스러워서 우리는 모두 정상인 척 편의점 인간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끝내 규격화되기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편의점 아르바이트 인생을 이어나가는 후루쿠라의 모습이 새삼 부러워졌다. 이소영/언론인, VA거주

2017-08-07

[마음을 읽는 책장]여름, 나태함 과의 전쟁

 A기자는 마감시간 1시간을 앞두고 기사를 쓰기 시작한다. 마감시간이 임박하기 전까지 그는 담배 피우고, 커피 한 잔 마시고, 이리저리 연예 기사를 기웃거리며 시간을 충분히 때운다. 그렇다 보니 마감시간 넘기는 일은 다반사이거니와 뒤늦게 올린 기사마저 오·탈자투성이다. A 기자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다. 나에게는 아직 몇 시간의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면 도저히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한다. 마감시간이 내 뒤를 바싹 뒤쫓아왔을 때 분비되는 아드레날린, 아슬아슬한 시간에 최종 기사를 송고했을 때의 쾌감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A기자는 아드레날린과 쾌감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항변했지만, 결국은 습관적 늑장 마감일 뿐이다. 습관은 무섭다. A 기자가 처음부터 일찍 기사를 작성하고, 여러 번 퇴고하는 습관을 익혔다면 그의 이름으로 발표된 수많은 기사는 질적 수준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고약한 습관일수록 고치기 어렵다. 뉴욕타임스에 근무하는 찰스 두히그 기자는 매일 오후 쿠키를 사 먹는 습관이 있었다. 얼마 안 가 4kg 정도 살이 쪘다. 습관을 끊으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하고, ‘쿠키는 인제 그만!’이라고 쓴 메모지를 컴퓨터 화면에 붙여 놓기도 했다. 하지만 매일 쿠키의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습관이 왜 이렇게 강력한지, 쉽게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두히그 기자는 취재를 시작했다. 취재결과를 담은 책이 ‘습관의 힘'이다. 하루라도 양치질을 거른다고 생각해보자. 상상만 해도 입안에 앙고라 털을 머금은 듯이 까슬하다. 세계 1차 세계대전 당시만 해도 이를 닦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펩소던트’ 치약에 개운한 느낌을 주는 첨가물을 집어넣으면서 치약 매출이 급성장했다. 이를 닦을 때의 거품과 닦은 후의 알싸한 느낌이 양치 습관을 형성하는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 펩소던트 광고 이전 6%에 불과하던 양치 인구는 광고 이후 60%까지 상승했다. 굳이 치약을 쓰지 않더라도 이를 닦을 방법은 다양하다. 하지만 치약 거품으로 헹궈야 깨끗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오랜 습관이 가져온 결과다. 미국 최대 커피 프랜차이즈 브랜드 ‘스타벅스’. 매출이 오르는 만큼 고객들의 요구도 다양해졌다. 스타벅스는 고객들의 항의에 대응하기 위해 직원들의 습관을 조정하는 ‘라테 법칙(Latte method)’을 개발했다. 그 결과 거칠게 항의하는 고객들에게 “꺼져”라고 소리치던 다혈질 직원들이 자제력을 발휘하는 놀라운 효과를 보였다. 어떤 의미에서 스타벅스는 미국 최고의 교육기관인 셈이다. 이렇게 습관은 개인의 삶을 넘어 기업의 성공과 실패의 열쇠를 쥐고 있는 무시무시한 요소다.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아이를 잘 기르고, 돈을 더 잘 벌고, 사회를 개혁하는 등 누구나 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그 일들의 중심에는 바로 습관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원하는 대로 습관을 바꿀 수 있을까? 두히그 기자는 책에서 “적절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회사에만 가면 간식을 너무 많이 먹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심심할 때(신호) 과자를 먹고, 기분을 환기(보상)한다. 습관을 바꾸기 위해 심심하다는 신호가 주어지면 과자를 먹는 대신 잠깐 서 있거나,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다. 즉 신호와 보상은 그대로 두고 반복된 행동을 조정하는 것이다. 또 열심히 운동한 후에는 맛없고 건강한 간식으로 자신을 보상하기보다 달지만, 몸에 좋은 과일 주스나 작은 초콜릿을 먹으라고 조언한다. 자신이 진심으로 즐길 수 있는 보상을 줬을 때 습관은 즐거워진다고 강조한다. 후회할 줄 알면서도 같은 일을 반복하고, “나는 왜 이거밖에 안 될까” 자책하고 있는 당신에게 습관을 바꿀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지 묻고 싶다. 변화를 위한 노력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다만 우리 몸과 마음이 나태할 뿐이다.

2017-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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